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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브리엘

레이브리엘 × 이데리하

 그 여자아이가 사는 저택은 요정이 남몰래 관리하는 폐가 같았다. 깔끔했으나, 붉은 빛이 하늘 너머에 저물면 불을 켜는 것이 아니라면 그 문간을 인랑 같은 생물이 쥐었을지도 모르므로. 물론 먼지가 내리지 않게끔, 문고리의 광택이 바래지 않게끔 관리하는 것은 저택의 어콜라이트의 몫이었고 창문을 노랗고 붉은빛으로 덧칠하는 것은 그 저택에 머무르는 전사들과 인형의 몫이었지마는, 그만큼 조용했다. 보통 그런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다만 그런 저택의 홀이 가장 폭넓게 개방되고, 알록달록한 접시들과 음식들이 도미노처럼 아슬아슬 나열되는 때가 있었다. 명목도 꽤나 가지가지다. 신년축제, 추수감사, 꽃의 축제. 인조로 짜낸 세계에서도 달력은 돌아갔으므로 기이하지는 않은 현상이다. 그렇게 1년에 한 번 도래하는 기념일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것이 있었다. 저택의 가장 작고 어린 주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층계 아래쪽에서 흐르는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중주가 이데리하의 방까지 열기처럼 스며 올랐다. 메렌이 제 아가씨 취향의 음악을 골라내 축음기를 정성껏 틀어놓은 모양이었다. 이데리하는 머뭇거리며 긴 세로거울 안의 제 모습을 살폈다. 손가락 위로 스치우는 탁한 황색 넥타이가 낯설었다. 빳빳하게 다려진 하얀 옷깃도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두께가 있는 가죽장갑과 다르게 얇은 면 재질의 하얀 장갑은 처음 껴보았다. 사실 이데리하는 지금 거울 속에 든 게 진짜 자기 모습인지도 꽤나 의심스러워했다. 맨 처음 레지멘트 제복을 받았던 시절의 동쪽 나라의 소년이 그랬듯. 복잡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
 문을 낭랑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갖는 또 하나의 지문. 그리고 이데리하는 그것으로 문 너머의 불특정 인물을 특정으로 분별해낼 수 있었다. 우직하고 단정한 리즈의 것, 경망스런 타악기를 다루는 양 요란스레 두들기고 허락을 채 하기도 전 우당탕 쳐들어오는 디노의 것. 그리고 지금처럼 똑바르게 선 유리벽 위를 내달리는 물방울들의 중주 같은 소리는 아마도 그녀일 것이다.
 이데리하는 문을 열고 드러난 아가씨의 모습에 고개를, 아주 살짝 갸우뚱 기울였다. 때에 맞춰 분갈이를 하고 정성스레 가지를 쳐내지도록 길러진 화초처럼, 발끝조차 드러내지 않는 드레스를 입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디노와 함께 상점에 들렀을 때 카운터 벽 너머에서 드레스 몇 벌이 그려진 종이를 심드렁한 눈으로 팔랑팔랑 넘기고 있던 그녀와 메렌을 발견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예상을 완벽하게 깬 검은 정장과 남색 셔츠의 가장 완벽한 조화를 두르고 지시자는 한참을 내려다보아야 하는 높이에서 시선을 맞댄 채 서 있었다. 그녀가 디디고 선 구두의 힐이 사파이어처럼 푸르고 맑게 빛났다. 소녀의 가슴에 매달린 푸른 빗방울을 닮은 브로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것 같아, 이데리하는 저도 모르게 주먹 쥐듯한 손을 입가에 갖다 댔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
 사실은 좋아하게 된 것, 이라고 표현함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파티의 주인공이 부러 이 옷차림을 하는 것에서부터, 숨겨진 또 다른 주연의 축하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누구는 눈치챌지도 모르고 누구는 절명할 때의 기억을 찾아 바인더를 떠나갈 때까지 모르고 있을 수도 있겠으나. 이 인형이 가장 바라는 짝이 저라는 사실을 그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소녀의 마음이 바다처럼 깊었다. 바닥이 검게 채색된 것으로 물의 깊이를 가늠하듯.


 “그 넥타이는 좀 아닌 거 같은데요.”


 늘 그렇듯 발화는 레이브리엘의 몫이다.


 “응?”
 “좀 많이 아닌 거 같다구요. 그 넥타이.”
 “…긍가. 틀리게 맨 데가 있는겨?”
 “아뇨, 색깔이.”


 많이 안 어울린다구요. 누가 그거 추천해준 거예요? 누군지는 몰라도 안목 있다는 말이랑은 되게 먼 사람 같네요. 방구석에 박힌 바퀴가 달린 이동식 옷장을 열며 레이브리엘이 중얼거렸다. 이데리하는 방 바깥을 살펴서 디노가 방 근처에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직접 듣는다 해도 그리 크게 상처받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단 그가 추천자였다-문을 차분히 닫았다.
 옷장 안에 얼굴을 박다시피하고 시종 뒤적이던 그녀는 마침내 어두컴컴한 남색이 감도는 넥타이를 손에 쥐고 이데리하의 앞에 다가섰다. 밤하늘을 찍어내 와 그대로 나염한 듯한 넥타이. 발을 디딜 적당한 의자를 골라 단정히 신을 벗고 올라서는 모습은 도도한 말괄량이의 작태지만, 요정의 춤사위이기도 하다. 제 넥타이를 한 손으로 끌어 채근하듯 톡톡 잡아당기는 인형의 손놀림에 맞춰, 이데리하는 선선히 한두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꽤 높은 다리의 벨벳 의자를 딛고 서도 소녀는 이데리하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았다.
 그녀가 넥타이를 매어주기 쉽게끔 고개를 숙이며 이데리하는 나름 주저해왔던 것을 물었다.


 “드레스, 안 입었어?”
 “네?”
 “시종들이 열심히 준비하는 것 같았는디…….”
 “아, 그거요?”


 이데리하의 칼라 안쪽으로 넥타이를 두르고 길이를 적당히 맞추며 레이브리엘이 종이를 넘길 때처럼 심상한 말투로 대답했다.


 “입어보기는 했는데, 계단 올라갈 때마다 치맛자락 들고 다니는 거 귀찮아서 집어치웠어요.”
 “……기껏 시종들이 준비해줬는디, 섭섭해할라.”
 “이데리하만 섭섭해하지 않으면 됐어요.”
 “섭섭해하믄 입을 거여?”
 “다음에요. 그동안은 치마 차림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하는 걸로. 제가 태어난 걸 기념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좀 봐줘요.”


 아가씨가 마침내 매듭에서 단정히 빼낸 넥타이를 당겨 그의 목에 맞추었다. 시선을 옆으로 비껴 보이는 거울이 잘 닦인 렌즈처럼 흠 없게 탈피하는 과정을 촬영하는 것 같았다. 이데리하는 넥타이의 매듭을 손가락으로 살짝 더듬으며 인형의 생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사람과 인형의 생일의 차이를 생각해보았다. 열 달 동안 어미의 자궁을 좁은 토지로 삼고 살다 세상으로 팽개쳐져 나오는 인간과 인형의 생일은 무엇이 다를지를. 그 모든 것은 사고하고 의문을 조약돌처럼 던지는 행위에서만 끝맺게 될 것이다. 그는 그녀가 아니니까.
 그럼에도 이 심해 같은 존재가 저를 필요로 해준다는 사실이, 가끔은 자꾸만 손을 마주뻗게 되는 달콤한 마법 같았다.


 “다음엔 조금 더 밝은 색으로 차려입어두 좋을 것 같구먼.”
 “드레스요?”
 “정장 말이여.”
 “헤에.”


 소녀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이다 자세를 바로잡고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이데리하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당신과 함께 춤을 출 영광을 베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데리하는 아가씨의 에스코트를 거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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